■ 이미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았던 것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함께 살아간다’는 말을 잊고 살고 있다.
공동체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 그 자리에 고립과 단절, 돌봄의 공백이 깊어지고 있다는 현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공동체를 이야기하기보다 드러난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우리가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았던 것을 다시 꺼내기 위해서다.
공동체의 회복, 아직 늦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눌음 돌봄은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공동체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시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경험하고 있다.
■ 사라진 것은 공동체가 아니라, 관계다
우리는 더 이상 함께 살지 않는다. 단지 같은 공간에 존재할 뿐이다.
보릿고개를 지나던 시절, 제주의 밥상은 한 집의 것이 아니라 마을의 것이었다.
먹을 것이 부족했기에 나누었고, 나누었기에 살아낼 수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공동체는 더욱 단단해졌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넘쳐나는 일상 속에서 음식은 더 이상 나눔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관계를 잇는 매개가 아니라 소비되는 하나의 선택이 되었을 뿐이다.
삶에 필요한 대부분을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게 되면서, 함께 살아갈 필요는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다.
지금 우리에게서 사라진 것은 음식도, 물질도 아니다.
관계다.
■ 정책은 인간을 따라야 한다
1933년 시카고 국제박람회의 표어는 “과학이 발견하면, 산업이 적용하고, 인간은 적응한다”였다. 당시에는 타당한 명제였다.
그러나 지금은 분명히 달라져야 한다.
이제는 “인간이 요구하면, 과학이 연구하고, 산업이 적응한다”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정책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동안 전문가와 행정이 설계한 정책에 적응하는 존재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이 구조는 바뀌어야 한다.
설계된 정책에 사람이 맞추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
이제는 도민의 삶과 요구에서 출발하는 정책이 되어야 한다. 도민은 더 이상 정책의 대상이 아니라, 정책을 만들어가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 수눌음 돌봄, 도민의 삶에서 시작된 정책
수눌음 돌봄은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등장한 사례다. 이 사업은 행정이 일방적으로 설계한 정책이 아니라, 부모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서로의 아이를 함께 돌보는 공동육아에서 시작됐다.
제주 고유의 상부상조 문화인 ‘수눌음’을 바탕으로, 돌봄을 개인의 책임이 아닌 공동체의 역할로 전환하려는 시도였다.
2016년 소규모 공동체로 시작된 이 실험은, 행정이 돌봄을 직접 제공하는 방식이 아니라 공동체 형성을 지원하는 구조로 설계되었다는 점에서 기존 정책과 분명한 차이를 가진다.
현재 200여 개 공동체로 확대된 참여는 단순한 사업 성과가 아니다. 이는 여전히 사람들이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관계를 회복하려는 욕구가 존재한다는 신호다.
■ 그러나 가능성은 멈추지 않아야 한다
수눌음 돌봄은 분명 의미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능성이 사장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지금의 변화는 단순한 돌봄사업의 성과가 아니다. 공동체를 기반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경험이며, 도민이 주체가 되어 새로운 방식의 돌봄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의 확인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유지가 아니라 확장이다.
돌봄을 통해 형성된 공동체가 다른 사회문제 해결로 이어지는 구조,
그것이 수눌음 돌봄이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변화다.
■ 수눌음, 제주 돌봄의 새로운 방향이 되어야 한다
이제 수눌음 돌봄은 하나의 사업이 아니라 방향이 되어야 한다.
아동 돌봄을 넘어 중장년과 노년으로 확대되어야 하며, 돌봄을 특정 시기가 아닌 생애 전반의 문제로 바라보는 전환이 필요하다.
또한 수눌음 돌봄에서 형성된 공동체는 돌봄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 관계는 지역의 다양한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모델이 대규모 재정 투입 없이도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시설과 인력을 확충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관계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이는 비교적 적은 예산으로도 실현 가능하며, 재정 부담을 최소화하면서도 돌봄의 효과를 확장할 수 있는 구조라는 점에서 정책적 의미가 크다.
더불어 지역경제와의 연결 역시 중요하다.
사업비를 지역화폐인 ‘탐나는전’으로 지급하는 방식은 돌봄과 지역경제를 동시에 순환시키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제주한라대 학생의 의견). 이는 공동체 기반 돌봄이 지역 경제와 연결되는 새로운 정책 모델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참여를 저해하는 행정 절차는 과감히 개선되어야 한다. 공동체 기반 사업은 관계와 참여에서 출발하는 만큼, 과도한 행정 부담은 그 흐름을 단절시킬 수 있다. 결과보고 간소화 등 참여 중심의 운영체계로 전환하여, 도민의 실천이 지속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 새로운 시작, 도민에게서 시작되는 정책
우리는 이미 경험했다. 공동체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시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수눌음 돌봄은 그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다.
도민의 삶에서 시작된 작은 실천이 정책으로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다시 관계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하고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 가능성을 남기는 것이 아니다.
그 가능성을 확장하고, 일상으로 만들어가는 일이다.
정책은 더 이상 설계되어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도민의 삶 속에서 만들어지고 관계 속에서 작동해야 한다.
여기서 멈춘다면, 지금의 성과는 하나의 사례로 남을 뿐이다.
도민의 경험은 정책의 방향이 아니라, 우연한 성과로 기억될 가능성도 있다.
이제 제주가 선택해야 할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확인한 이 가능성을 돌봄정책을 넘어 사회복지 정책 전반의 기획과 실행에 지속적으로 반영하는 일이다.
이제는 “인간이 요구하면, 과학이 연구하고, 산업이 적응한다”는 인간이 중심이 되는 흐름처럼, 제주의 복지는 “도민이 요구하면, 행정이 반영하고, 공동체로 완성된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김진훈의 '말말복지' 코너는...>
말말복지는 말이하는 복지, 말로하는 복지를 의미하며, 말을 통해 제주의 복지를 알리고, 정책을 만들어가는 복지사의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가치실현을 위해 15년간 도내외 대학에서 사회복지 관련 강의를 하고 있으며, 복지in연구소 유튜브 채널(https://www.youtube.com/c/복지in연구소)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김진훈 복지in연구소 소장
사회복지전공 석사 / 직업재활전공 박사 / 사단법인 복지인광장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