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신년이 되면 리스트를 만들어 그 해에 하고자 하는 일들을 기록하곤 했었다. 소위 새해의 다짐, 영어로는 resolution인데 몇 해가 지나면서, 큰 의미가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물론 작심삼일이라고 며칠 만에 시들해져 버린 이유도 있지만 그 보다는 삶에 대한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졌다고 말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정말 그랬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병고를 겪는 지인들을 돌아보면서, 나아가서는 훌쩍 황망히 떠나는 이들을 보면서 그동안 가졌던 많은 생각들이 하나로 집약된다. 단순한 삶, 소소하게 사는 삶, 즉 심플 라이프(Simple life)다. 그리고 무엇보다 천천히, 느리게 주위를 돌아보며, 계절의 변화를 음미하며 사는 삶이다. 아다지오적 삶이란 말이 어울린다.
바로크 시대 작곡가들 중에는 단지 음악 뿐 아니라 문학이나 미술 등 다른 분야의 예술에도 조예가 깊은 다재다능한 인물들이 많았다. 또한 이들의 대부분은 부유한 환경의 사람으로 바흐나 헨델, 비발디 처럼 음악을 생업으로 하지 않고 고상한 취미 생활의 일부로 여겼던, 소위 딜레탕트(Dilettante 취미로 예술을 즐기는 애호가)들 이었고,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알렉산드로 마르첼로(Alessandro Marcello)다. 이태리 베네치아 출신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자기 집에서 연주회를 열며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들을 선보였던 사람이다. 마르첼로는 음악 뿐 아니라 문학, 미술, 수학, 철학에 이르기까지 박식, 다재다능했던 인물로 로마문학단체에 가명으로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곤 했던 작곡가다. 바로 이 가명 때문에 한동안 그의 곡을 다른 작곡가의 곡으로 오인 받다가 뒤늦게 악보가 발견되면서 알려진 작곡가다.
오늘 소개하는 아다지오는 바흐의 피아노와 첼로를 위한 아다지오로 알려진 곡인데 원곡은 마르첼로의 오보에 협주곡 D단조 2악장 아다지오를 바흐가 건반악기에 맞게 편곡한 곡이다. 또한 첼로의 저음가지 곁들이면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는 곡이다.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수식어 중에서 굳이 말하자면 쓸쓸한 아름다움, 적요한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 시작부터 톡톡 튀기는 피아노의 둥글게 뻗어 나가는 선율에 맞춰 안정된 낮은 톤의 첼로가 모든 음을 한 곳으로 모아주는 묘미가 있다. 동양적 표현을 빌자면 왠지 처량하고 구슬프게 느껴져서 간혹 처연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끝까지 들어보면 좀 다른 면을 발견할 수 있다. 슬픔의 정상까지 오른 후 더 이상은 흐느낌없이 그 자리에서 머무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는 그 후부턴 내내 차분해진다. 절제의 미가 발휘되는 순간이다.
슬픔을 표현하는 낮은 첼로의 비음이 가슴을 쥐어짜듯 한 바탕 회오리 바람을 일으킨 후 다시 조용히 제 자리로 돌아오는 아다지오다. 분명 노랫말 같은 선율인데 어느 순간 흐느낌으로 변해 있다는 표현이 맞다. 언젠가 오랜만에 만난 지인의 말이 떠오른다. ‘슬픔에 달관하다 보니 이젠 흘릴 눈물도 없다고, 눈물이 말랐다고’ 그러면서 앞으로 다가올 일은 그것이 어떠한 일이든 좋은 일일 것이고 그래서 감사한다고. 그럴 것이다. 지인에게 지워진 슬픔의 무게를 모두 꺼내서 감당했으니 이젠 기쁨만 남았을 것이다. 그래야 공평하니까.
하루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 쯤에 들으면 숙연함 마저 느겨지는 바흐의 아다지오다. 원곡, 마르첼로의 오보에 협주곡 2장의 아다지오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이 곡으로 인해 우리는 바로크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 작곡가, 마르첼로와 바흐를 동시에 만난다. 서로가 태생도 다르고 인생여정도 달랐지만 곡 하나로 인해서 전 부터 무척 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느낌이다. 사실 신의 입장에서 보면 높낮이가 없이 모두 편편하게 보일 것이다. 마치 높은 산에 올라가서 아래를 굽어 볼 때의 느낌처럼, 5분 남짓한 바흐의 아다지오 한 곡이 많은 사유를 일으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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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실 칼럼니스트는...
서울출생. 1986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감.
2005년 수필 '보통 사람의 삶'으로 문학저널 수필부문 등단.
2020년 단편소설 '사랑법 개론'으로 미주한국소설가협회 신인상수상
-저서:
2015년 1월 '뉴요커 정은실의 클래식과 에세이의 만남' 출간.
2019년 6월 '정은실의 영화 속 클래식 산책' 출간
-칼럼:
뉴욕일보에 '정은실의 클래식이 들리네' 컬럼 2년 게재
뉴욕일보에 '정은실의 영화 속 클래식' 컬럼 1년 게재
'정은실의 테마가 있는 여행스케치' 컬럼2년 게재
'정은실의 스토리가 있는 고전음악감상' 게재 중
퀸즈식물원 이사, 퀸즈 YWCA 강사, 미동부한인문인협회회원,미주한국소설가협회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소설가협회회원, KALA 회원
뉴욕일보 고정 컬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