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망각(Oblivion)’이란 뇌의 작용이 없다면 세상은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는 일이다. 망각(忘卻)의 사전적 의미는, 개인이 장기 기억에 저장한 지식을 잃는 것을 뜻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억이 흐려지고 아예 잊혀지기도 하는 현상이라고 되어 있다. 레테(Lethe)는 그리스 신화에서 망각의 여신이며 망각의 강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이라는 영어 단어 ‘Lethal’역시 레테에 그 기원을 둔다. 망자가 하데스가 지배하는 명계로 가면서 건너야 하는 다섯 개의 강(아케론, 코퀴토스, 플레게톤, 스틱스, 레테)중의 하나가 레테의 강이다.
언젠가 읽었던 이문열의 소설 중에 ‘레테의 연가’가 있었다. 주인공 여자의 네레이션으로 시작되는 소설의 첫 부분은 무척 강렬하다. ‘나는 내일이면 한 남자의 아내가 된다. 여성에게 있어서 결혼은 하나의 레테의 강이다’. 지금와서 그 시절과 비교한다는 건 무리가 있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레테의 강을 건너면 지나온 모든 것을 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슬픈 것이던, 기쁜 것이던.
클래식 음악 중에도 망각을 주제로 작곡된 곡이 있다. 남미 아르헨티나의 작곡가, 아스터 피아졸라의 망각(Oblivion)이다. 피아졸라는 우리에게 사계로 잘 알려진 작곡가로 사계 중 겨울 부분은 많은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사랑받는 곡이다. 또한 클래식 음악계에서 피아졸라의 업적은 탱고를 클래식 반열로 끌어 올린데 있다. 마치 조지 거쉬인이 재즈를 클래식 반열에 올려놓은 것과 같다. 1921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난 피아졸라는 아버지가 반도네온(Bandoneon)이라는 악기를 물려주면서 음악과 접하게 된다. 유년시절을 뉴욕에서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클래식음악과 재즈에 눈을 뜨게 되고 1960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 5중주단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이 시절부터 피아졸라는 자신의 탱고를 새로운 탱고라는 의미의 누에보 탱고라고 명명하고 독창적인 탱고의 시대를 열게 된다. 1974년 유럽으로 건너가 십 여년을 파리, 암스테르담, 뉴욕, 도쿄 등을 순회하면서 누에보 탱고를 알리면서 클래식 음악계의 관심을 모으게 된다.
탱고라고 하면 우리는 영화 ‘여인의 향기’의 알 파치노를 떠올린다. 왜냐하면 영화 전반에 걸쳐 깔려있던 음악이 바로 탱고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춤곡으로의 탱고와는 사뭇 다른 누에보 탱고의 음률은 피아노, 바이올린 심지어는 첼로 또는 플룻 등 어떤 악기와도 잘 어울리는 음률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잘 어울리는 악기를 대라하면 서슴지 않고 아코디온 비슷하게 생긴 ‘반도네온’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정제되지 않은 음색, 그래서 더욱 원형에 가까운 음색, 누에보 탱고를 나타내기에 꼭 알맞는 음색이다. 피아졸라의 탱고를 클래식 반열에 올려 놓는데 기여한 인물을 한명 더 대라하면 주저없이 나오는 이름이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Gidon Kremer)다. 특히 피아졸라의 망각(Oblivion)은 라트비아 출신의 독일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의 연주로 인해 격이 한층 높아진 느낌마저 받는다.
피아졸라 자신의 반도네온 독주로 듣는 망각과 현악 합주협주와 함께 연주하는 기돈 크레머의 바이올린 연주와는 분명 차이가 많이 있다. 이미 클래식 음악에 젖어버린 우리 귀에는 후자의 연주가 훨씬 더 쉽게 닿을 수도 있을 것이다. 편곡 역시 듣기에 무리없이 해 놓았다. 그러나 조금 투박하더라도 오롯이 원형의 소리를 듣기 원하는 사람에게는 피아졸라 자신의 반도네온 연주가 더 가슴을 파고드는 사무침이 느껴지는 음률이 될 수 있다. 곡의 뒷 부분으로 가면서 점점 레테의 강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드는 곡이다. 피아졸라의 마지막 곡으로 그 자신도 가장 사랑했던 곡이고 그의 곡 중에서 가장 서정성이 물씬 풍기는 무척 아름다운 곡이다. 이 곡에 대해 피아졸라 자신이 한 말이 있다. “모든 인간의 행위에는 망각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살아 숨 쉬는 유기체의 생명에는 망각이 필요하다.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내 기억 속에 묻혀 잊히는 것뿐이다. 나를 기억에 묻고 너를 그 위에 다시 묻는다”
왜 제목이 망각인지 곡을 듣고 생각해 볼 일이다. 그 부분은 오직 듣는 자의 몫이므로.. 우리에게 망각의 기능을 주신 전능자에게 감사하면서 듣는 피아졸라의 망각은 그래서 더욱 친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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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실 칼럼니스트는...
서울출생. 1986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감.
2005년 수필 '보통 사람의 삶'으로 문학저널 수필부문 등단.
2020년 단편소설 '사랑법 개론'으로 미주한국소설가협회 신인상수상
-저서:
2015년 1월 '뉴요커 정은실의 클래식과 에세이의 만남' 출간.
2019년 6월 '정은실의 영화 속 클래식 산책' 출간
-칼럼:
뉴욕일보에 '정은실의 클래식이 들리네' 컬럼 2년 게재
뉴욕일보에 '정은실의 영화 속 클래식' 컬럼 1년 게재
'정은실의 테마가 있는 여행스케치' 컬럼2년 게재
'정은실의 스토리가 있는 고전음악감상' 게재 중
퀸즈식물원 이사, 퀸즈 YWCA 강사, 미동부한인문인협회회원,미주한국소설가협회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소설가협회회원, KALA 회원
뉴욕일보 고정 컬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