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미술, 영화, 음악 등의 예술 중에서 음악 만큼 추억을 소환해 내는 능력이 강한 쟝르도 드물 것이다. 특히 계절이나 거리 풍경 또는 주고 받았던 이야기 조차도 음악을 들으면 새록새록 떠오른다. 또한 어디 그뿐인가, 같은 음악이라도 이제 인생의 전반전을 시작하는 십대나 이십대에 들었을 때와 한참 생의 현장을 누비고 다니는 삼사십대 또는 자식에 대한 최소한의 임무가 끝나서, 조금은 자신만의 시간이 주어진 오육십대에 듣는 느낌은 많이 다르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2번은 클래식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도 익히 들어 본 적이 있는 곡이다. 심지어는 곡을 못 들었어도 제목 만큼은 마치 라흐마니노프를 대변해주듯 일려져 있는 곡이다. 이렇게까지 유명세를 타게 된 이유는 물론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가장 으뜸되는 이유는 그만큼 곡의 내용이 만인에게 어필되는 곡이고 그 중에서도 1악장 시작부분의 강한 울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선율이다. 그래서 많은 영화에서 이 부분을 영화의 독특한 장면이나 영화의 사운드 트랙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클래식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제대로 듣기 시작하던 십대 말과 이십 대초, 감수성이 가장 예민했던 그 시절 처음으로 들었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2번은 마치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후에도 여러 번 글 속에 필자의 감흥을 마치 헷세의 데미안에서 ‘알을 깨고 나오는 새”같은 느낌’이란 표현을 썼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오랜 날이 지나고 사십대의 말, 불혹의 끝에 서서 이 곡을 들으며 했던 말도 기억한다. “나는 아직 신의 이름을 찾지 못했노라고”
이 곡을 연주회에 직접 가서 듣거나 또는 CD나 LP, 요즘은 유튜브로 원하는 심포니를 골라가면서 들었으니까 딱히 그동안 몇 번을 들었다고는 말 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아마도 수백 번은 들었을 것이고 이 곡에 대해 쓴 글만도 대여섯 번은 될 정도로 입에 착 달라부터 외워진 곡이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만 들으면 필자의 생각이 난다고 했던 친구가 있을 정도로 아마 필자가 들은 음악 중 횟수로 치면 수위의 반열에 오르는 곡이다. 사랑을 찾아, 진리를 찾아, 마침내는 신을 찾아 한참 방황했던 이십 대 중반 실존의 한 가운데서 니체와 싸르트르에 탐닉했던 그때 만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2번은 나에게 실낫같은 희망이었다. 그리고 내게 속삭여왔다,”이제 곧 알게 될 터이니 잠잠하라”고
그토록 갈구해도 찾을 수 없던 아프락싸스를 가장 가까운 곳, 바로 내 안에서 찾았을 때의 환희, 그리고 그때 들었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2번은 2악장으로 나에게 답해줬다. 1악장 시작의 클레믈린 종소리같은 강한 울림은 없지만 아다지오 소스테누토의 2악장은 오롯이 러시아의 애수가 깃든 악장으로 괜찮다고, 이제 되었다고,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다고 도닥여주는 악장이다. 그래서 1악장을 듣고 바로 2악장을 들으면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숨이 쉬어지고 마침내는 눈물 한번 안 흘리고는 지나갈 수 없는 악장이다. 몰아세우듯,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귀 기울이며 들었던 1악장, 그 1악장에서 용암처럼 솟아흐르던 열정의 분출을 차마 전부를 수용할 수 없어 허덕거리며 온 몸으로 악장 전체를 감싸고 안았던 젊은 날들, 마침내는 힘에 부쳐 덜컥 주저앉을 때 흐르던 2악장의 고마움을 어떤 말로 표현해야할까, 2악장은 바로 그런 악장이다. 너 혼자 짊어지고 가는 길이 아니라고, 손 내밀어 주는 악장이다.
알려진 대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2번은 교향곡1번의 실패 후 극심한 노이로제와 우울증에 빠져있을 때 우울증에서 라흐마니노프를 구해 준사람이 심리학자 니콜라이 달(Dahl)박사였다. 2번은 역시 그가 가르쳐준 대로 끊임없는 자기암시법으로 마침내 라흐마니노프는 우울증을 극복하고 피아노협주곡2번을 작곡하게 된다. 라흐마니노프(11873~1943)는 시기적으로 보자면 후기낭만파에 속한 작곡가로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났을 때 미국으로 망명해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호로비츠를 만나 평생 지기로 살게 된다. 그래도 항상 조국 러시아에 대한 애환과 사랑을 죽는 날까지 간직하고 지냈다는 증거는 그의 곡 전반에 걸쳐 잘 나타나있다.
물론 시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언젠가 한국인이 뽑은 제일 애호하는 클래식 반열의 1위에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2번이 당당하게 올라 있는 걸 보고 적잖이 놀랐던 적이 있다. 라흐마니노프는 모두4곡의 피아노협주곡을 작곡했는데 그중에 2번이 가장 유명하고 지금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최고로 알려진 곡이 되었으니 이젠 차라리 클래식음악이라기 보다는 ‘대중음악’같은 느낌이 드는 곡이 되었다.
대중적인 클래식 곡,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2번을 협주곡의 묘미인 카덴차와 내 인생의 카덴차를 생각하면서 듣는다면 더욱 아름다운 곡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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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실 칼럼니스트는...
서울출생. 1986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감.
2005년 수필 '보통 사람의 삶'으로 문학저널 수필부문 등단.
2020년 단편소설 '사랑법 개론'으로 미주한국소설가협회 신인상수상
-저서:
2015년 1월 '뉴요커 정은실의 클래식과 에세이의 만남' 출간.
2019년 6월 '정은실의 영화 속 클래식 산책' 출간
-칼럼:
뉴욕일보에 '정은실의 클래식이 들리네' 컬럼 2년 게재
뉴욕일보에 '정은실의 영화 속 클래식' 컬럼 1년 게재
'정은실의 테마가 있는 여행스케치' 컬럼2년 게재
'정은실의 스토리가 있는 고전음악감상' 게재 중
퀸즈식물원 이사, 퀸즈 YWCA 강사, 미동부한인문인협회회원,미주한국소설가협회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소설가협회회원, KALA 회원
뉴욕일보 고정 컬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