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이 선포되고 난 후 지난하고 긴 탄핵 투쟁이 이어졌다. 겨울이었고 눈보라 휘몰아치고 바람 막을 곳 하나 없는 광장에서 사람들은, 그저 버텼다. 여러 곳에서 도움과 나눔의 손길이 있었지만 그 차가운 길목마다 앉아서 끝없어 보이는 시간을 인내한다는 것은, 그저 버텼다라는 말로밖에 표현되기 힘든 부분이 있다. 스스로의 결기와 내면의 목소리에 이끌려 엉망진창이 된 이 세상을 바라보며 버텨딘 그들 내면의 심지는 무서울 만큼 단단하고 솜털처럼 연약한 이중의 마음이 엉킨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으므로, 사랑이라 말하지 않고서는, 지독할 만큼 웃으며 울며 행동할 수 없는 것들이었으므로.
개인의 비대한 욕심과 망상으로 한 나라를 송두리째 뒤흔든 계엄의 밤 이후 파면이 확정될 때까지 활동가들과 시민들이 지속해온 이 지난한 투쟁의 시간은 상상할수록 자주 공포스럽기까지했다. 추위와 배고픔과 업무와 일상의 즐거움을 반납한 몇 개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개월. 그들이 지켜낸 시민들의 일상은 그들에게 진 빚은 그들의 핏값은 결코 잊혀져선 안 될이라고 많은 이들이 생각하고 있다고 믿는다. 국가적으로 적절한 보상과 치료도 수행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는 활동가들의 업무와 돌봄 노동자들의 업무에 대해서 매우 박대우하는 실정이다. 활동가들을 개인의 이익에 눈멀어 돈에 환장하는 사기 데모꾼으로 매도하였다. 돌봄 노동의 경우는, 오랜 인류 역사에서 여성의 노동력으로 지탱해 온 형태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하거나 하는 등 폄훼되고 농락당해온 시절도 길었다. 신기하게도 이들의 노동에 대해서 마치 물건 값을 흥정하듯, 기본 노동시간은 무시한 채 저렴하게 이용하기 위해, 가성비를 따지기까지 한다. 더불어 친절하고 상냥한 태도는 디폴트라 여긴다. 맡겨놓은 것처럼 활동가들이, 돌봄 노동자들은 감정노동을 강요받는다.
활동가와 돌봄 노동자의 중간 쯤 자리에 사회복지사가 있다. 활동가들처럼 다채로운 정치의 최전선에서 투쟁하고 나아가지는 않지만 그들과 시민들이 쟁취해낸 인권의 최전선의 일상에서 다양한 사업으로 관념을 현실로 실행시킨다. 또한 돌봄 노동자들처럼 밀착된 관계는 아니지만 다양한 참여자∙이용자들의 심신 가까이에서 서로 라포를 형성하며 지속적인 돌봄을 수행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어중간한 곳에 위치한 탓에 인권 활동에 기민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수행을 하면서 역시나 거리감을 둔 채 어중간한 돌봄을 실행한다고 평가되곤 한다. 하지만 이들이 있기에 인권의 관념은 현실이 되고 각각의 돌봄은 지속성을 갖는다는 것은 쉽게 망각된다.
결과적으로 활동가들과 돌봄 노동자들과 사회복지사들은 모두 빚진 채 업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친절한 태도와 감정노동을 강요받는다. 참여자나 이용자 등 동료 시민들은 대체로 다정하지만, 때때로 사실은 생각보다 많은 경우 다정하라, 친절하라, 웃어라고 강요당한다. 이견이 있거나 감정이 상하면 감정노동이 감정이 담보 잡힌 사람들은 그저 굽히고 들어가야 한다. 사실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다. 거슬리면 머리를 들고 큰소리치는, 기부니즘과 괘씸죄에 걸린다. 감정노동은 자신의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어서 정신적 멱살이 잡힌다. 인권위에 진정 넣겠다는 소리도 우습게 한다. 그게 협박이라는 것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이런 말들을 남발한다. 궁금하곤 했다. 이럴 때 활동가들을 필두로 한 이 모든 사람들의 인권은 어떻게 되는 걸까.
우리나라 서비스직에서는 당연하다 못해 마땅하다 여겨지는 태도들, 가령 웃음과 친절들, 가령 상점의 직원들이나 승무원들의 경우조차, 외국에서는 무표정이 디폴트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많이 충격적이었다. 부러웠다. 주어진 업무와 안전관리만 잘 수행되면, 담당 업무만 잘 추진되면 무엇이 문제냐 입장이 기본인 사회가 있다는 것이, 몹시 부러웠다. 눈감고 그런 노동자들이 있는 우리나라에 대입해 보았다. 그런 날이 하루라도 있다면, 아마도 그날은 개인 간 다툼이 가장 많이 일어난 기념비?적인 날이 되지 않을까 싶다. 감히 웃지 않았다고, 감히 무표정했다고, 감히 상냥하지 않았다고 욕설과 주먹부터 날아오는 상상은 한국인이면 쉽게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불쾌하고 슬프게도, 이 태도라는 점, 그렇게 문제라고 걸고넘어지는 태도라는 지점이 너무 상대적 강자 입장의 입맛에 맞춘 형태라서, 을들의 세상 노동자들의 인권도 무참해 지는 사태가 우리나라엔 너무 많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하라.” 한때 참 감동 받았던 문장이다. 서글프게도 이 글귀를 본 이후 십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글귀가 을들의 입장에서 쓰이는 것을 본 적이, 개인적으로는 없다. 이 문장은 절대로 강자 입장에서 쓰이지 않는다. 상대적 약자들에게, 을인 사람들에게 교훈하고 가르치고 명령하기 위해 쓰일 뿐. 외국에서 들여온 인권적 개념과 명언들이 현지화 되기 십상이라 하지만, 국내 생산이든 수입된 것이든 이 나라에서는 철자하게 자본주의적 입장에서 오남용 되어 비틀리는 것을 보면, 그래서 상대적 강자들의 논리를 공고히 하는 데 사용되는 것을 보면 우습다가도 무섭다. 나이가 이 나라의 노동자 중에 감정노동자가 아닌 이가 있는가 싶어서 그러니 최전선에 있는 활동가들을 생각하면, 지독하게 이기적인 과잉 감정노동 강요 세상이, 다시 아찔해지는 것이다.
[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은...
'작은 사람'이란 사회적약자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구조적 차별의 위치에서 벗어나기 힘든 여성, 노인, 아동, 청소년, 빈곤,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더 나아가 동물권까지 우리나라에서 비장애 성인 남성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다수 구조적 차별과 배제의 현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부장제 하의 남성은 '맨박스'로 괴롭고 여성은 '여성혐오'로 고통을 받습니다. 빈곤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침범하여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공장식 축산은 살아 있는 생명을 사물화하고 나아가 단일 경작 단일 재배 등을 통해 기후위기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사회적약자의 소수자성이 교차될수록 더욱 삶이 지난해지고 그 개별화된 고통의 강도는 커집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제가 겪고 바라본 대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때로는 우울하게,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다양한 언어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